애인 / 이정록

2018. 10. 11. 08:12마음의 쉼터/차 한 잔과 시

애인

이정록

천이백세 살 먹은
내 애인 용봉사 마애불은
천 년 넘게 돌이끼를 입고 서 있다
돌이끼의 수명이 삼천 살 정도라니
내 생애에 옷 한 번 해 입히기는 글렀다

저 돌이끼도 찬찬히 돌여다보면
나만큼이나 장난기 실한 녀석이 있다
내 애인의 실소를 꼭 봐야겠다고
콧구멍에다가 터를 잡은 것이다
재채기 소리 한 번 들으려고, 천 년 넘게
코딱지를 간질이고 있는 것이다

어쩌다 속세의 아내와 아이들 앞에다 세우고
본처이자 큰엄마이니 절 올려라 농을 치며,
잠깐만이라도 애인의 은밀한 곳에다 터를 잡아야겠다고
불경스럽게 불경 몇 구절을 조아리는 것이다
배꼽 언저리 물오른 돌이끼를 어루만지다가
손톱 밑에다, 고쟁이 쪽 실오라기 한 올 심어 오는
것이다

그래 엄지손톱이 이제 용봉사 마애불이다
손톱 밑에 옮겨 온 이끼 한 뿌리
콧구멍 속에다 디밀어 놓고는, 나도
천 년쯤 재채기를 참아볼까나
마애불처럼 슬며시 웃어도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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