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쉼터/김혜순 시인 시 읽기(6)
-
핏덩어리 시계
핏덩어리 시계 내 가슴속에는 일생을 한번도 쉬지 않고 뚝딱거리는 시계가 있다 피를 먹고 피를 싸는 시계가 있고, 그 시계에서 가지를 뻗은 붉은 줄기가 전신에 퍼져 있다 저 첩탑 위의 시멘트 시계를 둘러싼 줄기만 남은 겨울 담쟁이처럼 나는 너의 시계를 한번도 울려보지 못했다 그리고 누구도 내 ..
2009.11.30 -
검은 눈동자
검은 눈동자 1 세상에서 제일 큰 주머니! 폭풍우 끝난 뒤 깨끗하게 씻은 콘택트 렌즈를 얹자 길이 30km로 늘어나는, 그래서 멀리 네거리에서 좌회전하는 네 흰색 자동차 꽁무니도 담겨지는, 내 눈동자가 내 몸 위에 떠 있는 게 아니야 내 몸이 내 두 눈동자에 매달려 있는 거지 2 사랑하는 그대와 내가 각..
2009.11.02 -
자전거
자전거 자, 이제 내가 나의 밖에서 살아갈 시간이 왔어 내 귀에 주파수가 불가청 데시벨에 맞추어지고 몸 밖에서도 내가 살아갈 수 있다는 게 이상하지도 않아? 공기가 내 몸 속으로 들어왔다가 별 볼일 없다 나가는 소리 오줌통이 꽉찼다 철렁거리는 소리 제대로 땅에 박히지 못한 뼈들이 삐걱거리고 ..
2009.10.31 -
이다지도 질긴, 검은 쓰레기 봉투
이다지도 질긴, 검은 쓰레기 봉투 내 몸 어디에 목숨이 숨어 있는 걸까요? 밤처럼 검은 머리칼로 묶인 이 쓰레기 봉투 속 어디에 목숨이 숨어 있는 걸까요? 시체를 몰래 갖다 버린 범인을 잡으려는 듯 청소부들이 검은 쓰레기 봉투를 큰길 가에 쏟아놓고 집게로 들쑤시고 있어요 버려지 것들이 오히려 ..
2009.10.29 -
밤 전철을 타고 보니
밤 전철을 타고 보니 전동차가 지상으로 솟구치자 어디론가 달려가는 집들 술 취한 남편의 몽둥이에 맨몸을 맡긴 채 비 맞는 유리창들은 검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전선에 목을 매느라 고개를 수그린 붉은 십자가들 전동차의 아가리에서 뽑아지는 침 흘리는 붉은 레일 그 위에 실린 채 자꾸만 달..
2009.10.25 -
잘 익은 사과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빰보다 더 차가운 한 송이 구름이 하늘에서 내..
2009.1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