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다지도 질긴, 검은 쓰레기 봉투

2009. 10. 29. 15:26마음의 쉼터/김혜순 시인 시 읽기

이다지도 질긴, 검은 쓰레기 봉투

 

내 몸 어디에 목숨이 숨어 있는 걸까요?

밤처럼 검은 머리칼로 묶인 이 쓰레기 봉투 속 어디에

목숨이 숨어 있는 걸까요?

시체를 몰래 갖다 버린 범인을 잡으려는 듯

청소부들이 검은 쓰레기 봉투를

큰길 가에 쏟아놓고 집게로 들쑤시고 있어요

버려지 것들이 오히려 모든 내용을 알고 있지요

드넓은 초원에서 양을 먹고 사는 사람들은

양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보면서 심지어

내일의 날씨도 점칠 수 있다지요

검은 봉투 속에 밀봉된 채 악몽의 풍경 속을

기차를 타고 갔었지요 달아났었지요

잘려진 손톱처럼 날카로운 산의 나무들

핏빛 파도를 닦은 생리대와

사각의 푸른 종이 상자에서 툭툭 튿어지던 희디흰 크리넥스

처럼 내려앉은 저녁의 날개 없는 새들

머나먼 레일처럼 도르르 말린 필름

내 몸 속 어딘가에서 송출하는 영화

그 어디에 목숨이 숨어 있는 걸까요

몸부림 치고 있었어요 검은 쓰레기 봉투 속에서

다시 태어나려고요 나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던 거예요

검은 쓰레기 봉투 속에서 날벌레의 애벌레들이 확 쏟아지자

흠칫 놀란 청소부들이 한발짝 몰러나고

절대로 썩지 않을 꿈의 냄새가

밤거리를 물들였어요 내 몸 속 어디에 목숨이 숨어 있는 걸까요?

십만 개도 넘는 머리칼들이 콱 움켜쥔

검은 쓰레기 봉투 하나가 밤거리에 서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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