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쉼터/차 한 잔과 시(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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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덩이 / 이정록
웅덩이 이정록 바람이 거세어지자, 자장면 빈 그릇을 감싸고 있던 신문지가 골목 끝으로 굴러간다, 구겨지는 대로 제 모서리를 손발 삼아 재빠르게 기어간다 웅덩이에 빠져 몸이 다 젖어버리자 그제야 걸음을 멈추고 온몸을 바닥에 붙인다 스미는 것의 저 아름다운 안착 하지만 수도 없..
2018.10.24 -
가을비 / 이정록
가을비 이정록 단 한 번의 빗나감도 없이 오직 정타뿐이어서 벌레 한 마리 다치지 않는 저 참깨 터는 소리 불길 헤집던 부지깽이가 나이테도 없는 빈 대공을 어루는 소리 골다공증의 뼈마디와 곳간 열어젖힌 꼬투리가 긴 숨 내쉬는 소리 비운 것들의 복주머니 속으로만 저 초가을 빗소리
2018.10.15 -
애인 / 이정록
애인 이정록 천이백세 살 먹은 내 애인 용봉사 마애불은 천 년 넘게 돌이끼를 입고 서 있다 돌이끼의 수명이 삼천 살 정도라니 내 생애에 옷 한 번 해 입히기는 글렀다 저 돌이끼도 찬찬히 돌여다보면 나만큼이나 장난기 실한 녀석이 있다 내 애인의 실소를 꼭 봐야겠다고 콧구멍에다가 ..
2018.10.11 -
더딘 사랑 / 이정록
더딘 사랑 이정록 돌부처는 눈 한 번 감았다 뜨면 모래무덤이 된다 눈 깜짝한 사이도 없다 그대여 모든 게 순간이었다고 말하지 마라 달은 윙크 한 번 하는데 한 달이나 걸린다
2018.10.08 -
옻나무 젓가락 이정록
옻나무 젓가락 이정록 십 년도 더 된 옻나무 젓가락 짝짝이다. 이것저것 집어먹으며 한쪽만 몰래 자랐나? 아니면 한쪽만 허기의 어금니에 물어뜯겼나? 어머니, 이 젓가락 본래부터 짝짝이였어요? 그럴 리가. 전 그럴 리가가 아니고 전주 이간데요. 저런 싸 가지를 봐. 같은 미루나무라도 ..
2018.10.03 -
오누이 / 김사인
오누이 김사인 57번 버스 타고 집에 오는 길 여섯살쯤 됐을까 계집아이 앞세우고 두어살 더 먹었을 머스마 하나이 차에 타는데 꼬무락꼬무락 주머니 뒤져 버스표 두 장 내고 동생 손 끌어다 의자 등에 쥐어주고 저는 건드렁 손잡이에 겨우겨우 매달린다 빈 자리 하나 나니 동생 데려다 앉..
2018.0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