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이프러스 사이로 난 눈길을 따라 - 고 영민

2010. 1. 8. 23:20마음의 쉼터/차 한 잔과 시

싸이프러스 사이로 난 눈길을 따라

 

   고 영민

 

눈이 왔다

싸이프러스 사이로 난 눈길을 따라 너와 함께 걷는다

목도리로 얼굴의 반을 가린 너는 한동안 나를 쳐다보았고

말없이 다가와 팔짱을 끼워줬다

나는 속으로 행복하다고 말했다

싸이프러스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고,

가끔씩 큰 눈보라가 일었다

우리는 뒤돌아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다가

바람이 잠잠해질 쯤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나는 속으로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때 너와 나의 머리칼과 눈썹, 털옷에는

눈가루가 얹혀 빛나고 있었다

우리는 그때 산사로 연결된 그 길가 나무의 이름이

싸이프러스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나무는 그저 거대하고 의연했다

그 큰 나무는 가끔씩 가지에 얹혀 있던

무거운 눈덩이를 털어내곤 했다

걷는 동안 우리는 자그마한 소리로

거꾸로 자라는 나무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이 겨울, 허공에 뿌리를 두고

땅속으로 땅속으로 끝없이 가지를 뻗으며

진초록의 잎새를 늘리고 있는

땀 흘리는 나무에 대해 얘기였다

땅속으로 새들이 날고

그 푸른 허공으로 빗줄기가 쏴, 하고 쏟아질 때에도

나는 몇번씩이나 속으로 행복하다고 말했다

싸이프러스 사이로 난 눈길은

걸어도 걸어도 끝나지 않고

새의 발자국 같은 흔적들이 그 위에 고스란히 남겨졌다

가끔 나는 등뒤에서 누가 부르기라도 한 듯

걸어온 길을 돌아다봤다

소실점처럼 어떤 것으로부터 나무도, 너와 나도

점점 멀어져가고

너도 나처럼 그 길의 후미를 몇번이고 돌아다봤다

그곳엔 몇백년을 한곳에 서서

눈을 맞고, 말없이 얹힌 눈을 털어내고 있는

정오의 싸이프러스가 있었고

그 사이로 난 눈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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