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릴 곳이 아닌 곳에 - 심경 3 / 임동확
2012. 3. 23. 15:34ㆍ마음의 쉼터/차 한 잔과 시
내릴 곳이 아닌 곳에 - 심경 3
임동확
얼마나 짐승처럼 비굴하게 굴어야
삶은, 겨우 길을 허락하는가
오래 버려둔 폐가 같은 탄전 지대의 고갯길
미끄런 빗길을 막 넘어가려는데
한쪽 눈이 성하지 못한 한 아낙네
결코 지정된 정류장으로 보이지 않는
검문소 근처에 자신을 내려달라 하소연한다
무너진 갱도에서 방금 기어나온 듯한
더할 수 없이 낮게 깔린 어투로
비안개 길을 조바심하며 헤쳐나가는
버스 운전사 등뒤로 주춤주춤 다가선다
행여 거부해도 전혀 항의할 수 없는 거기에도
절박하나마 버젓한 인기척이 있다는 듯
설령 그곳이 곧장 붕괴될 막장일지라도
그녀에겐 꼭 돌아가야 할 곳이라는 듯
급기야 성한 다른 한쪽 눈에
눈물까지 비칠 듯 애원하기 시작한다
누가 봐도 내릴 곳이 아니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을 게 뻔한
그날의 합승객들을 보기 좋게 배반이라도 하듯
어떻게든 목적지에 하차할 수 있었던
그녀는 언제 그랬느냐 하는 뒷모습으로,
낯선 자에겐 여전히 어둠이고
절망일 뿐이 그 길을 대명천지 가듯 한다
마치 애써 거부하고 외면해온 그곳이
미처 가늠하지 못한 생의 여백이었고,
측량할 수 없었던 또 하나의 통로였다는 듯
그렇게 깊숙이 합장한 마음으로 무성한
처녀림 저쪽으로 조금은 당당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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