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쉼터/차 한 잔과 시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 나희덕
길따라야
2017. 3. 31. 10:26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나희덕
우리집에 놀러 와. 목력 그늘이 좋아.
꽃 지기 전에 놀러 와.
봄날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화하던 그에게
나는 끝내 놀러 가지 못했다.
해 저문 겨울날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나 왔어.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는 못 들은 척 나오지 않고
이봐. 어서 나와.
목력이 피려면 아직 멀었잖아.
짐짓 큰소리까지 치면서 문을 두드리면
조등 하나
꽃이 질 듯 꽃이 질 듯
흔들리고, 그 불빛 아래서
너무 늦게 놀러 온 이들끼리 술잔을 기울이겠지.
밤새 목력 지는 소리 듣겠지.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그가 너무 일찍 피워 올린 목력 그늘 아래로.